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두루마리구름

<ㄷㄷ썰> 외갓댁에서 본 여자애.

정글구름 2023. 10. 26. 23:19

초딩때, 명절이라 외갓댁을 갔다. 크지도 않은 집에 온갖 어른들이 다 모여 자기들끼리 떠들며 담배 피우는게 갑갑해 밖으로 나왔다.

외갓댁 앞에는 2차선 도로가 있고 맞은 편엔 언덕이 있다. 나는 도로 옆까지 걸어가서 건넛편의 언덕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.

왜 그랬는진 몰라도 문득 오른편 뒤를 돌아보게 됐다.
여기서부터 50? 100미터 정도되는 거리. 논둑치고는 폭이 넓은 길 위를 내 또래의 여자애가 걷는다. 그 애는 이 도로의 옆까지 가 서 있었다. 나 처럼.....


그 애는 머리카락이 아주아주 길었다.
묶지도 땋지도 않은 머리카락은 복사뼈까지 닿을 만큼 길었다. 우리 학년에도 머리를 엉덩이 넘게 기른 애가 있어서 별로 놀라진 않았다.

하얀... 그러나 때가 잔뜩 탄 민소매의 무늬도 장식도 없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어째선지 몸 이곳저곳이 얼룩덜룩 지저분했다. 멍이 든 걸지도 모르고 뭔가 묻은 걸지도 모른다.

맨발에 양말조차 신지 않고 걷는 그 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.

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볼 수 없었다. 거리가 멀어서가 아니라.... 뭐였더라...? 역시 풀어헤친 머리카락 때문인가? 아냐. 무슨 이유 때문인진 몰라도 내 시야가 그 애 얼굴로 잘 올라가지 않는다.

옆으로 서 있는 모습이라 더 그랬는진 몰라도 아랫턱 부근을 측면에서나 볼 수 있었는데 건조하게 떡이진 듯 한 거친 머리카락들에 가려져 그나마 보이는 면적에도 그늘이 지어 있었고 얼굴 주변엔 검은 연기 같은 덩어리들이 둥실 둥실 떠있었다.

그 광경을 보면서도 난. 한적하고, 노인과 어른밖에 없는 이 작은 시골마을에 또래 여자애가 있다니?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나 했다.

나는 어쩌면 슬슬 밀려오는 공포심을 외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.

길고 긴 머리카락이나 지저분한 몸과 맨발 같은건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는데

이상했어. 눈을 떼고 싶어도 뗄 수 없었던게 이상해. 누가 강제로 내 눈을 잡고 있는 것 처럼....
그리고 그 애를 보고 있을수록 빨려 들어가는 느낌....? 나의 개별적인 생각이나 행동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이었다.
그게 지나쳐지면서 그 애 주변의 검은 빛들이 더 확장되고 그 애 모습은 일그러지는 듯 보여지며 귀가 점차 소란스러워졌다.

나는 어떻게든 나한테 집중하며 고갤 반대편으로 잡아 끌 듯 돌렸고 집 쪽으로 걸었다. 와중에도 그 애가 너무 궁금했다. 내가 다시 보길 원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벗어나기 힘들어질 것 같아서 아예 집으로 들어와 버렸다.

잠시 숨을 고르고 멍하게 방금 전 일에 대해 떠올리다가 할머니한테 또래 여자애를 봤다 했다. 그치만 이 동네에 어린 여자애는 없단 말만 들었다.

지금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 하나 더.
멀리 있는 애를 내가 왜 그렇게 가까이서 보는 듯 했는지.... 손 내밀면 닿을 것 처럼 가깝게

-2022.02.15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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